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라트 아데나워 (문단 편집) === 연합군 군정 시기 === 쾰른을 점령한 미군은, 행정직 경험이 있으면서 나치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을 관직에 앉혀 행정력의 공백을 최소화하고자 했고, 아데나워는 그에 딱 맞는 적임자였다. 미군정에 의해 그는 쾰른 시장에 다시금 임명된다. 그 직후 쾰른은 미군 관할에서 영국군 관할로 넘어가게 되는데, 아데나워는 경제 정책 및 전쟁 중 쾰른 폭격 문제 등을 놓고 영국군과 사사건건 대립선을 세우곤 했다. 그리고 결정적으로, 영국 군정청 몰래 프랑스 군정청과 추후 점령구역에 세워질 새로운 국가 체제와 관련하여 의견을 주고 받은 것이 발단이 되어[* 전후 모든 독일인들의 정치활동은 연합군에 의해 금지되었고, 임시로 임명한 시장들은 어디까지나 행정처리 역할을 맡을 뿐이었다.] 결국 1945년 10월에 쾰른 시장직에서 해임되고 만다.[* 아데나워는 자신이 해임된 이유가 당시 [[클레멘트 애틀리]]를 총리로 하는 영국의 [[노동당(영국)|노동당]] 정부가 보수적인 자신보다 사민당을 파트너로 선호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. 다만 아데나워의 전기를 쓴 작가는 아데나워의 뒤를 이은 쾰른 시장도 기민당 출신이라는 점을 들면서 아데나워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 바 있다.] 하지만 이 해임은 오히려 아데나워에게 정치적으로 이득이었던 것이 '필요하다면 점령군과도 맞설 수 있는 강단있는 지도자'라는 이미지를 그에게 심어주었을 뿐만 아니라, [[갓수|해임 이후 시간이 남으면서]] 아이러니컬하지만 신당 창당에 더 전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. [[기독교민주연합]]의 주요 창당 인사 중 하나가 된 그는 1949년 5월 서독 제헌위원회장의 자리까지도 오른다.[* 다만 아데나워가 제헌에 크게 기여한 바는 없다. [[테오도어 호이스]]는 "그는 단 한 줄도 기여하지 않았다."(...)라고 단언하기도 했다.] 이 무렵까지만 하더라도 다수의 기민련 인사들은 73세라는 평균수명을 뛰어넘은 고령[* 지금도 73세에 대통령직에 출마하면 나이가 너무 많지 않냐는 우려가 나올 지경인데 하물며 이 시기에야 73세는 거의 반쯤 송장 취급되던 연령으로 1950년대 전반기 기준으로 독일의 평균수명이 약 68세였으니 아데나위가 조만간 세상을 떠도 할말이 없을 정도의 나이였다.], 상대적으로 낮은 인지도 등을 고려하여 그가 킹 메이커의 위치 정도에 머무를 것이라고 예측했다. 하지만 1949년 8월 초대 독일 연방하원의 선거가 끝난 직후 아데나워의 자택에서 열린 기민련 인사들의 식사 자리에서, 아데나워는 총리직에 대한 야망을 밝힌다.[* 아데나워는 상당히 구두쇠 기질이 강한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에, 2차대전 패전 직후의 극도로 궁핍한 상황에서 그가 사람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제공한 사실은 당대 정계 인사 사이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. 그 자리에 있었던 [[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]]는 '아데나워가 자기의 와인을 다른 사람에게 대접한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.'라고 회고하기도(...)] 쿠르트 키징어를 필두로 일각에서는 [[총리]] 대신 명예직인 [[대통령]]을 맡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, 아데나워는 자신의 오랜 정치경력을 바탕으로 이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.[*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험상 아데나워가 무려 14년을 집권할 거라고 본 사람도 전무했을 뿐더러, 아데나워 본인도 딱 2년만 총리를 맡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되면 사임할 것이라고 말했다. 덧붙여서 총리직을 맡기 가장 적절한 장년 정치인들이 나치 부역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아데나워의 총리 취임에 기여했다.] ||<:>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220px-CDU_Wahlkampfplakat_-_kaspl001.jpg]] || ||<:> 당시 선거 포스터 || >'''Mit Adenauer,''' >아데나워와 함께 >'''für den Frieden, die Freiheit,''' >독일의 평화, 자유, >'''und die Einheit Deutschlands,''' >그리고 통일을 위해 >'''darum CDU''' >그러므로 기민련 선거에서 아데나워와 기독교민주연합은 [[자유민주주의]]와 [[사회적 시장경제]] 체제를 구축하고 서방세계에 편입되는 것이 재통일[* 독일에서 '통일'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19세기에 이루어진 통일을 지칭하며,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통일은 재통일이라고 표현한다.]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. 그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의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여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고 번영을 구가하는 것이 재통일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. [[쿠르트 슈마허]]와 사회민주당은 미-소 사이의 중립국을 지향하며 재통일을 이루자는 입장을 보였고 부분적인 계획경제를 주장하며 [[민주사회주의|민주사회주의적]] 경제노선을 내세웠다. 그리고 선거 결과 원내 1당은 사민당이 차지하나, 기사련과 연합한 기민련이 자민당, 독일당까지 끌어들여 연정을 성사시키면서 집권당이 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